약관에 자살보험금을 지급한다고 해놓고 지급하지 않은 보험사들에게 금융감독원이 중징계를 내리면서 보험소비자들에게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잘한 일일까? 사실 애매한 점이 좀 있다. 나도 보험을 드는 일반 개인이지만 금융감독원의 행위가 약간 주먹구구식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내용을 대충 정리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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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보험사들이 일반사망보험에 재해사망특약을 넣어서 함께 팔았다. 이 때 '가입후 2년 뒤 자살한 경우에도 재해로 인정하겠다'라는 약관을 넣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재해'라는 명칭이 자살과는 연관되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고 약관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당연히 보험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자살보험금을 청구한 경우에도 보험사들이 사망과 재해를 구분하면서 제대로 돈을 지급하지 않았다. 그러자 2007년 9월, 한 유족들이 대법원에서 자살보험금 지급하라는 판결문을 받아냈다.
2014년, 금융감독원이 보험사들에게 지급 명령을 내리면서 약관에 재해 속에는 자살도 포함되어있다는 내용이 널리 알려졌다. 보험사들은 아무리 그렇더라도 재해에 사망을 포함할 수 없다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약관을 지켜야 한다며 보험사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단, '소멸시효가 지난 경우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추가판결도 내놓았다. 대법원에서 난 판결을 뒤집을 수는 없는 법, 이 판결은 그대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이 다시 나섰다. 소멸시효가 지난 것들도 모두 줘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2017년 2월, 영업정지라는 강력한 징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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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 어색한 점이 느껴지는건가?
이 사건은 사실 어쩌고 저쩌고 더 따지기가 어려운 사건이다. 왜냐하면 대법원에서 이미 판결이 끝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삼권분립 국가이고, 법치주의 국가다. 분쟁이 생기면 사회의 약속에 의해 정해진 법에 의한 판결이 내려지고 이것이 집행된다. 그런 사회의 약속을 정하는 것이 입법부인 국회이고, 판결을 내리는 곳은 사법부이며, 집행하는 곳이 행정부다.
타 부서에 당연히 조금씩 연관된 행위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셋의 행위는 엄격히 구분해야하며 지켜져야 한다. 그런데 사법부에서 내린 판결을 행정부인 금융감독원에서 제멋대로 엎어버리고 판결을 새롭게 내려서 집행하려는 것이 과연 옳은 행위인가?
법이라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예측가능성과 법적 안정성이 있다. 내가 하는 행위로 어떤 판결과 제재가 나올 수 있을지 대강 예상이 가능해야 하며, 그것이 쉽게 바뀌지 않아야 한다. 대강 예상이 가능해야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지킬 수 있고, 쉽게 바뀌지 않아야 사회적으로 혼란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소멸시효 등이 있는 까닭도 이런 중요한 법개념과 함께 한다. 소멸시효 등이 없으면 채권 등을 청구당할 수 있는 입장에서 평생동안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이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마치 행정명령과 징계가 법보다 앞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게 옳은 것일까? 대중들, 아니 국민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행정부나 입법부에서 법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적 태도가 아니었던가? 이것도 따져보면 국가 권력을 쥔 고위공무원들이 법을 무시한 태도를 취한 것인데 이것을 지지하는 것이 정말 맞는 것인가 싶다.
물론 당장 봤을 때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기분 좋을 수 있다. 도의적 책임이나 도덕상으로도 이것이 옳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법을 무시하는 게 아닌가? 최근에는 더 그렇지만, 평소에도 국민들은 정치인, 고위공무원들에게 무척 불만이 많다. 그 이유는 당연히 불법적인 행위를 하면서 법 따위를 무시해도 된다는 식으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면 왠지 그들이 그런식으로 마음껏 행동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자신들을 찍어주는 사람들이 법을 존중하지 않는데 거기서 뽑힌 대표들이 과연 존중을 하겠냐는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국민을 대변하는 사람들인데, 국민들이 자기이익에 부합한다 싶으면 법따위는 무시해도 된다고 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2007년 판결이 났을 때 애초에 이를 널리 알리고 행정명령을 내려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압박을 넣지 않은 금융감독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사탕발림을 하나 던져주니까 이런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다. 혼나야 할 대상이 오히려 칭찬을 받는 모습을 보고 있어야 하다니...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법치국가가 되려면 멀었구나 싶다.
1. 법을 무시하는 국민들이 뽑은 대표가 법을 만들기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민주주의에서 무시 당하기 딱 좋은 법안이 만들어지고(단통법 같은 것들)
2. 그것은 집행하는 집행부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법을 무시한다.
3. 이미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정해진 틀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려도 소용이 없다.
어쩌면 법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든 인간들이 가장 나쁜 것이랄지도 모르겠지만, 큰 틀에서 보면... 신뢰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좀 두서 없이 써내렸지만 결론은 자살보험금에 대한 금감원의 징계가 바람직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진정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해주고 싶다면 자신들의 월급 및 부서 예산들을 반납해서 미지급금을 지급하는 것이 더 옳은 판단이라 본다. 그렇지 않으면 대법원 판결이 '이러이러한 법적 관점에서 잘못된 판결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직 금융위원회의 승인도 있고, 보험사들의 행정소송도 남아 있다. 우리나라가 만약 법치주의 국가가 맞고, 대법원 판결이 법 안에서 내려진 공정한 판결이 맞다면, 당연히 이번에 내려진 징계가 다시 엎어질 것이다. 물론 법도 무시하는 고위직들에게 과연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까 싶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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